Elephant
Elephant. Elephant
Elephant.Elephant. Elephant.
창문으로 들어오는 미세한 노을이 탁자위의 작은 양초에 붉은 기운을 물들이는 시간이었다. 나는 다음날 교양 과목 시간에 제출할 리포트를 정리하고 있었기에 그녀가 조심스럽게 문을 열고 다가와 내앞에 작은 명함을 건네는 것을 미쳐 알아차리지 못했다. 금색 빛깔이 도는 보통 크기의 명함이었고, 자연스러운 필체로 씌여진 글씨는 짙은 남색의 영문체였다. Elephant. 코끼리? …잠시 멍한상태로 고개를 들지 않고 명함에 새겨진 그 영문체를 바라보았다 그리고 고개를 들었다. 그녀는 낡은 청바지 위에 물이 조금 빠진 듯한 옅은 분홍색의 스웨터를 입고 있었고, 스웨터 안쪽으로 잔잔한 꽃무늬가 그려진 검은색 블라우스가 적당하게 보였다. 단정한 웨이브 머리카락은 적당한 길이로 어깨위에 드리워져 있었다. 그녀는 대체 어디에서 불쑥 나타난 것일까.
“제 명함인데요, 받아주세요.”
그녀는 시선을 거두지 않고 말했다.
“아..네, 그런데 무슨 일이신지...”
나는 갑자기 정신이 번쩍 드는 느낌으로 의자에서 엉덩이를 떼고 일어났지만, 책상에 너무 바짝 앉아 있어서, 무릎이 책상에 닿았고 그래서 반쯤 어정쩡한 자세가 되어버렸다. 의자를 뒤로 빼면 똑바로 일어설 수 있었지만, 그럴 여유는 없었다. 정말..그럴만한 여유가 없었다는 것이 진실이다.
“이곳에서 제가 만든 악세서리를 좀 판매할 수 있을까해서요”
그녀가 순식간에 책상 위에 검은가방을 올려놓고 뚜겅을 열어젖혔다. 잠깐 나는 놀랬던 것 같다. 순간 그녀가 잡상인일지 모른다는 생각이 머리를 스쳤지만, 그 뻔한 사실이 중요하지 않다고 나는 스스로에게 말하고 있었던 것 같다. 확실하지는 않지만….
“저기..네..그럼,..잠깐요!”
나는 검은가방 밑에 무척 중요한 서류가 있음을 시사하는 손동작을 보인 후, 조심스럽게 정리된 리포트를 끄집어내고 가볍게 한숨을 내신 다음에 그녀에게 살짝 미소를 지어보였다. 어디서 그런 자연스러운 반응을 생각해낼 수 있었는지 나로서는 무척 대견스러울 정도였다. 그렇지만 그녀는 여전히 무표정이었고, 나는 리포트를 빨리 가방에 집어넣은 후 이번에는 확실하게 의자를 뒤로 빼고 똑바로 일어서서 가방안을 들여다보았다. 대학가나 길거리에서 흔히 볼 수 있는 악세서리였다.모두 은으로 만든 것으로 보였고, 귀걸이와 목걸이 그리고 반지도 있었다. 다만 모두 하나같이 코끼리 장식이였다는 것이 특이했다.
“이쁘네요..모두,..코끼리구요.”
그녀를 향해 다시 미소를 지어보이는 것이 예의라고 생각해서 나는 그렇게 말한 후 또 살짝 웃어보였다.
“ 하나 사세요.” 그녀가 왼쪽 눈썹을 가볍게 치켜 올리며 말했다.
이로써 그녀가 잡상인이 맞다는 내 예감은 적중했지만, 그녀를 쫓아낼 방법은 생각나지 않았다. 도대체 그런 상황에서 어떻게 그녀를 문밖으로 나가게 할수 있을런지….분명히 내가 했어야 하는 올바른 대응은 이거였다. 곧 갤러리 문을 닫을 시간이라고 말한 후, 이곳은 이런 악세사리를 판매하지 않는다고 단호하게 얘기하고 그녀의 검은 가방의 뚜껑이 닫힐때까지 미소를 잃지 않으며, 그녀가 뒷모습을 보이고 나갈때에 안녕히가세요,라고 인사만 하면 끝인 것이었다. 과연..
“ 아..제가요?....” 손가락 하나를 들어 얼굴을 향해 가리키며 나는 그녀에게 되물었다.
“ 네.”
그녀는 흥미는 있으나, 조금은 따분하다는 듯한 눈초리로 나를 쳐다보았다. 잠깐 그녀에게서 시선을 거둔 후 다시 그 악세사리들을 바라보았다. 남녀겸용인지를 물어보는 것이 무척 어리석을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명백하게 나에게는 필요없는 물건이었다.
“ 제가 살만한 게 없는 것 같은데요. 뭐 누구 사다줄 사람도 없구요. 그러니까, 설사 사다준다고 해도..하지 않을 것 같은데..아... 이런..”
정말 나는 ‘이런!’이라는 감탄사를 사용했고, 그녀의 입꼬리가 살짝 올라가는 것까지 놓치지 않고 곁눈질로 보고 말았다.
“코끼리는 행운을 뜻해요.” 그녀는 천천히 심호흡을 하며 얘기했다
“코끼리가 왜 행운을 뜻하는지는 모르겠지만, 그렇다네요.” 그녀가 좀 더 빠르게 말을 이었다.
“아...그래서, 모두 코끼리뿐인가요?’ 내가 말했다.
“코끼리가 만들기도 제일 쉬워요.”
그녀는 정말 제일 쉽다는 듯한 표정으로 가볍게 어깨를 들어올린 후, 가방안에서 목걸이 하나를 꺼내었다. 얼핏 보기에도 쉽게 만든 것 같지는 않았지만, 그녀는 진심인 것 같았다. 꺼내들은 목걸이를 왼쪽 손바닥에 올려놓은 후, 내 얼굴앞으로 손을 뻗었다. 얼떨결에 나는 그녀가 내민 손을 떠받들듯이 잡고 흡사 전당포에서 물건을 확인하는 사람처럼 주의깊게 그 목걸이를 쳐다보았다.
“이걸로 사세요”
그녀는 내가 손을 잡고 있다는 것에 대해서 아무런 반응도 보이지 않으며 간결하게 말했다.
“아..이걸요?”
나는 줄곧 그녀와의 대화에서, ‘아’ ‘네.’ ‘이걸요’라는 말을 반복하고 있었다. 그녀는 고개를 끄덕였고, 내가 오른손으로 목걸이를 집어 올린 후 이걸 어떻게 해야 할지 모르겠다는 멍청한 표정을 지을때까지도 나는 그녀 손을 잡고 있었다. 몇 초간 침묵이 흐르고, 어느틈엔가 그녀의 손은 다시 원상태로 돌아가 있었다.
“이 코끼리는 아프리카 코끼리인가요?” 내가 물었다.
그녀는 의외라는 눈빛으로 나를 쳐다보았다.
"아니요. 아프리카 아니예요. 아프리카 코끼리는 덩치가 좀 더 크고 사납죠. 그러니까 제가 만든 코끼리는 아프리카가 아닌 어떤 나라에서 행운을 뜻해요."
무슨 소리인지 알수는 없었지만, 아프리카 코끼리는 아닌 모양이었다.
"그러면, 그 어떤나라가 구체적으로 어디를 말하는 건가요?"
몹시 궁금했기에 내가 재빠르게 물었다. 그녀는 잠시 시선을 허공의 어디쯤인가에 두는듯 싶더니 이내 대답했다
"태국이요..아니, 베트남일꺼예요. 그러니까 제가 길에서 어떤 사람을 만났는데, 아니요, 실은 꿈을 꾸었는데요..어떤 여자가 제게 그 목걸이를 사라고 했어요. 행운을 뜻한다고 그러더군요. 코끼리가요. 그래서 제가 목걸이을 사게 된거예요. 꿈에서요. 그러고나서 저는 지금까지 계속 코끼리를 만들고 있어요. 행운을 만드는거죠.”
그녀는 꿈에서 태국인지 베트남인지 정확하지는 않지만, 코끼리가 행운을 뜻한다는 어떤 나라의 여자에게서 그 목걸이를 산다. 그리고 행운을 만들기 위해서 코끼리 악세사리를 만들고 있으며, 내게 그 코끼리 목걸이를 팔려 하는 것이다.
"그럼 그 여자를 꿈에서 만나기 전에는 무엇을 만드셨나요?"
일리있는 질문이었다. 분명히 꿈이 전환점이 되었을 것이다. 코끼리 이전의 그녀가 무척 궁금했다.
"글쎄요. 아무것도 만들지 않았던 것 같군요."
그녀의 말투는 조금 그렇게 3인칭이었다.
"왜요?"
"저기.. 당신은 행복한가요?" 그녀는 내 질문에 답을 피하며 엉뚱하게도 다른 것을 되물었다.
"네?..아..음..글쎄요. 뭐, 불행한 일도 없으니까 행복하다고 할 수 있겠네요."
왠지 빨리 코끼리 목걸이를 하나라도 팔아주는 것이 편할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곧 갤러리 대표에게 전화를 걸어 오늘의 특이사항을 얘기하고 문을 닫고 정리해야 한다. 남은 리포트는 집에 가서 마저 한다고 해도 이렇게 코끼리 목걸이와 씨름할 시간은 없었다. 아니, 그녀와 말이다. 그녀는 내가 초조해한다는것을 알아챘는지 못했는지 더 진지한 목소리로 얘기했다.
"행복하냐고 물어보는 사람들은 사실 행복하지 않기 때문에 상대방에게 질문을 하는 거죠. 과연 다른 사람들은 행복함을 느끼기나 하는 것인지 궁금하기 때문이죠. 본인은 이렇게 행복하지 않은데, 왜 당신은 행복한가요 라는 의아함이 섞인 질투일 수도 있구요. 그러니까 그런 질문의 배경에는 불행이란 단어가 짙게 깔려있어요. 이를 알아차린다면 좀더 대화가 쉽게 풀리죠."
꼭 그녀는 날 염두해두고 하는 말인 것 같았다. 결국 지금 그녀는 코끼리 목거리를 팔지 못해서 행복하지 않다는 뜻인가. 그럭저럭 행복한 나는 어서 목걸이나 사라는 얘기인가. 아무튼 결론은 하나였다.
"네, 그렇군요. 이거 얼마인가요? 살께요,제가요. 뭐, 나중에 누구 선물하면 좋겠죠."
그녀는 쓸쓸하게 웃었다. 간담이 서늘할만큼 쓸쓸한 웃음이어서 오금이 저릴정도로 으스스했다. 아름다운 여자들은 왜 다 저런 웃음을 가지고 있는 것인지.
"행복을 믿나요?"
그녀는 금세 웃음기를 배제한 얼굴로 물었다. 이렇게 보니 그녀는 아무런 장신구도 하고 있지 않다. 심지어 귀걸이도 안했다.
"믿기 보다는 쫓아가는 거죠. 희망사항처럼요. 차라리 행운을 더 믿겠어요."
나는 시계를 흘끗 쳐다보았다. 내가 전화를 하지 않는다면 분명 대표가 전화를 하며 조금 신경질적으로 바쁘냐고 할 것이 뻔하다. 그런 전화를 그녀 앞에서 받고 싶지는 않다.
"그게 결국은 행복을 믿는 문제에요. 행복을 쫓는 것은 행운을 얻으려 발버둥치는 것과 마찬가지 이니까요."
"네. 아무튼 이걸 사죠. 코끼리가 행운이든 행복이든 제게 뭔가를 주겠죠. 안그래요?"
나는 조금 조바심이 나는 것처럼 서둘러 말해버렸다. 너무 건성으로 대답한 것 같아서, 그녀를 빨리 밖으로 몰아내려고 하는 내 마음이 들켜버려서 속상할 정도였다. 그녀는 가만히 나를 쳐다보더니 가방의 밑바닥에서 조그마한 상자를 꺼냈다.
"2만원이요. 포장해서 드릴께요."
케이스까지 준비해서 주려는 그녀의 차분한 모습에 주눅이 들 정도였다. 나는 책상 옆에 둔 가방안에서 지갑을 꺼냈다. 만원권 두장을 꺼내서 그녀에게 건넸다. 그녀는 말없이 돈을 받고서는 언제 정리했는지 닫혀진 검은색 가방을 들었다. 목걸이가 든 케이스는 책상위에 아까의 명함과 함께 놓여 있었다.
"그럼, 잘 사용할께요. 감사합니다."
나는 어울리지도 않게 갑자기 정중하게 그녀에게 말했다. 뭘 사용하겠다는 건지. 말해놓고서도 멋쩍었다.그때 '따르릉' 전화벨이 울렸다. 분명히 갤러리 대표일 것이다. 그녀는 눈짓으로 살짝 인사를 건네고 유유히 갤러리 밖으로 사라졌다. 나는 전화기를 집어 들었다.
"네, 갤러리입니다."
대표에게 짧막하게 하루 일과를 보고하고 내일 스케줄을 얘기한 후 전화를 끊었다. 갑작스런 정적으로 어색할 만큼 갤러리 안이 조용해졌다. 나는 잠시 꿈이라도 꾼 것 같은 기분으로, 책상을 정리하고 아까의 케이스를 열었다. 다시 한번 목걸이를 보고 싶었던 것이다. 빈 케이스에는... 목걸이가 없었다. 나는 잠시 멍하게 앉아서 문을 쳐다보았다. 이것이 꿈이라면 꽤나 먹먹한 것이리라. 케이스바닥에는 조그맣게 접혀 있는 쪽지가 있었다. 뭔지 알 수 없는 기분으로 천천히 쪽지를 들어 펴 보았다. 작은 글씨는 다음과 같았다.
'당신은 행운을 사셨습니다.
잃어버리지 않는 한.. 당신은 행복합니다.'
-코끼리가
written by Beyondcafe