의미심장한 내면
“뭘요?”
여자는 오히려 반문하고 있다. 이야기를 하고 싶은 것인지, 치료를 받고 싶은 것인지 알고 싶다는 남자의 얘기에 은근히 대답이 빗겨나간다.
“그럼, 제가 이 방에 걸려 있는 그림들에 대해서 물어보겠습니다. 무슨 생각이 드시는지 그냥 편하게 말해보세요.”
그는 여자가 시선을 돌려서 한번이라도 그림을 쳐다봤으면 좋겠다고 생각했다. 그러나 그런 간단한 제안에도 그녀는 흔들림이 없다.
그녀는 정확하게 11시에 문을 열고 들어와 한 시간 반 동안 시간을 낼 수 있다고 조용히 말했다. 예약명부에 적혀진 대로라면 그녀는 전문직에 종사하며 서른여섯이고 아직 미혼이다. 꿈에 대한 자질구레한 의심들로 인해서 무척이나 괴롭다는 메모가 마지막에 간단히 적혀 있었다. 방에 들어선 그녀의 옷차림은 간소했지만, 규칙은 있어보였다. 귀걸이와 목걸이는 모두 은이었고, 늘어지지 않을 만큼 적당하게 보였다. 그녀는 오른쪽 중지와 약지에 모두 반지를 끼고 있었다. 약지에 끼워진 반지에는 이니셜이 새겨 있는데, 알파벳 P로 시작되는 것 같다. 나머지 스펠링은 그녀의 표정처럼 손가락 안쪽 깊이 모호하다.
그는 말없이 앉아있는 그녀를 다시 쳐다보았다. 냉철함이 엿보이는 얼굴선은 매끄러웠지만, 반복적인 업무의 중압감으로 인해 생겼는지 눈가에 잔주름이 확연하게 드러나 있었다. 변호사이거나 혹은 패션 관련 홍보담당자일지 모른다. 아니면 엉뚱하게도 예술가이던가. 화이트 셔츠에 청바지 차림이지만 탄력 있어 보이는 몸가짐은 운동에 늘 단련되어 있는 것처럼 기민하게 보인다.
그녀, 아까부터 너무도 가라앉아 있는 이 고요함이 거슬린다. 남자는 방안 중간에 놓인 소파에 등을 지고 앉아 옅은 회색의 노트를 들여다보고 있었다. 책상은 없었고, 노트북도 보이지 않았다. 그저 존재하는 것은 숨소리까지 다 흡수할 것 같은 크림색의 카펫, 갈색 소파, 그리고 벽에 걸린 그림들이 전부였다. 그림들은 하나같이 원색에 가깝다. 정면 창문 아래에 비스듬하게 놓인 그림은 엉클어진 나무색의 무늬들이 사선으로 쭉 이어진 모양이다. 형태는 문드러져 있지만, 분명히 그것은 풍경화다. 동쪽 벽의 그림은 잉크 자국처럼 붉게 퍼진 멍울들로 화려하다. 작은 점들 사이의 간격은 일정치 않지만 바닥의 둥근 카펫과 묘하게 대칭을 이루고 있다. 맞은편의 푸른 그림은 형식 없이 그저 캔버스 자체가 물감처럼 묽다. 사각 프레임 속 짙고 깊은 빛은 우아하리만큼 차분하다.
“그림은 천천히 얘기하죠.”
여자의 목소리는 단조롭지만, 날카롭다. 이유 없이 그녀가 긴장한 탓이리라.
“그러니까, 전 지금 치료받기를 원하는 것도 맞고, 이야기를 하고 싶은 것도 맞아요. 하지만, 그냥 뭐라도 다른 얘기를 좀 하죠. 꼭 그림은 아니더라도 말이에요.”
여느 다른 사람들과 달리, 그녀가 이 상황을 두려워하고 있지 않다는 점이 특이하다고 그는 생각했다. 주저함이 없었고 이유 없이 경계하지 않았다. 다만, 뭔가 숨기려 한다는 것이 마음에 걸린다. 그것이 무엇이든 간에, 쉽게 말하지 않을 거라는 것은 분명했다.
“일반적으로 여기 오시는 분들 중에 정신과 상담도 같이 하시는 분들이 꽤 있죠. 그런데 굳이 저를 먼저 찾아왔다면, 그림 치료가 우선이거나 아니면 의료적인 기록이 남길 원하지 않는 현실적인 이유이거나…. 둘 중에 하나겠네요. 제 말이 맞나요?”
그는 노트를 덮어 한쪽으로 치우며 말했다.
“여긴, 좀 덥군요. 그리고 너무 조용해요. 조명도 불필요하게 밝고요. 당신은 너무 가깝게 제 맞은편에 앉으셨어요. 편하게 시선을 둘만한 공간이, 저는 좀 필요해요.”
“전 원래 여기 앉아 있었습니다. 제 앞에 그렇게 앉으시더군요. 불편하시다면, 제가 이렇게 옮겨 앉죠. 그리고 조명보다는 밖의 햇살이 좀 밝군요. 커튼을 치겠습니다.”
남자는 자리를 옮겨 앉는 시늉을 하더니, 이내 창가로 걸어가 커튼을 쳤다. 실내는 비밀스러운 밀실처럼 금세 아늑해졌다. 그는 소파로 바로 다가가지 않고 창가에 그대로 서서 그녀를 바라보았다. 그녀가 원한다면 그림 얘기는 정말 필요 없을지 모른다는 생각이 스쳤다. 그렇다면 지체할 필요가 없었다.
“꿈이 그렇게 중요할 만큼, 현실이 재미없나요?”
그는 단도직입적으로 물었다. 그가 의미하는 현실이란, 요컨대 지금 그와 그녀가 마주한 이 상황을 의미하기도 했다.
“때때로 그렇죠.” 그녀는 부정하지 않고 말을 이었다. 살짝 눈꺼풀이 흔들렸다.
“요즘은…아니, 단지 그 꿈이 절 안절부절 못하게 하고 있을 뿐이에요. 중요하다는 게 아니라, 자꾸 생각이 나요. 악몽도 아닌데 그냥 꿈의 의미가 점점 확대돼요. 그건 사실 스케치에 가까운 밑그림일 뿐인데 시간이 흐를수록 색이 입혀지고, 형상은 뚜렷해지고, 여백은 비좁아져요. 난 아무것도 한 것이 없는데 말이죠.”
그녀는 얘기에 집중하려는 듯 두 손을 모아 깍지를 끼고 무릎위에 얹었다. 그녀의 숨소리가 안정적인 리듬을 보일 때까지 그는 잠자코 기다렸다. 커튼에 가려진 바깥은 미세한 먼지더미와 알 수 없는 소음만이 존재하는 먼 우주처럼 느껴졌다. 잠시 후, 그는 그녀를 향해 돌아서서 물었다.
“어떤…꿈인가요?”
아주 오랫동안 그 말을 기다린 것처럼, 긴 호흡 끝에 그녀가 입을 열었다.
“전 아주 고급스럽고 기품 있는 어느 레스토랑에 앉아 있어요. 검은 대리석으로 꾸며진 홀의 기둥 때문에 지나가는 웨이터의 모습이 순식간에 사라지는 묘한 공간이죠. 저는 안쪽 가장자리의 테이블에 앉아 있고, 제 맞은편에는 동행한 남자가 앉아있어요.”
그녀는 창가에서 꼼짝도 안하고 자신을 향해 서있는 남자에게 고개를 돌렸다. 하지만 그는 그녀를 보고 있는 것이 아니다. 다시 숨을 고르고 그녀는 이야기를 시작했다.
사실, 그 꿈에서 남자의 얼굴은 보이지 않았다. 너무 희미했다. 오직 뚜렷했던 것은 그의 감미로운 목소리와 동작이었을 뿐. 하지만…그것만으로도 충분했다. 그녀가 조금은 소란스러운 분위기에서 자신의 앞에 앉아있는 남자를 찬찬히 쳐다본다. 어디선가 빌려 입은 듯 어색한 옷차림의 그는, 긴장이 되는지 계속 물을 마시고 있다. 어느새 자연스럽게 다가온 웨이터는 그녀의 유리잔에 와인을 따르고 있고, 무척 앳돼 보이는 그녀와 꿈속의 남자는 천천히 스테이크를 먹기 시작한다. 다른 테이블의 사람들도 저마다 흥겨운 모습들이다. 그들에게 둘러싸인 그녀 역시 약간 상기된 채 이 순간을 즐기고 있다. 그녀는 자신이 입고 있는 검정 미니스커트가 너무 짧은 것 같아 조금 신경이 쓰인다. 남자의 시선도 이를 모른 척 하지 않는다. 둘은 조심스럽게 얘기를 나누며 간간히 웃음을 터트린다. 이때, 테이블 앞으로 웬 중년의 남자가 지나가고 그녀가 황급히 고개를 숙인다. 남자는 태연하게 고개를 들어 그 중년의 남자를 빤히 쳐다보지만 당황한 건 마찬가지이다. 중년의 남자는 그녀의 직장 상사인 것 같다. 왠지 모르지만 이 상황을 들키고 싶지 않은 그녀의 얼굴이 순식간에 창백해진다. 조금 후, 상사는 홀연히 사라지고 기분이 상한 듯 굳은 표정의 남자는 대뜸 그녀를 향해 이렇게 말한다.
“우리 식사는 이쯤하고, 어디 방으로 갈까요?”
멍하니 할 말을 잃은 채, 그녀는 와인 잔만 뚫어져라 쳐다본다. 얼굴이 화끈거린다. 화가 나는 것인지, 눈물이 나는 것인지 알 수가 없다. 그녀는 말없이 자리에서 일어섰다. 한쪽 의자에 걸쳐 있는 검은색 코트와 가방을 집어 들고, 남자에게는 눈길도 주지 않으며 입구 쪽으로 빠르게 걸어 나간다. 갑작스런 그녀의 행동이 암묵적인 승낙일지 모른다고 오해한 남자는 야릇한 미소만 지을 뿐이다. 문 앞에서 뒤돌아보니, 남자는 웨이터에게 뭐라고 말을 하며 지갑을 꺼내고 있다. 시간이 별로 없다. 그녀는 레스토랑을 빠져나와, 무작정 도로 옆 골목길로 들어섰다. 인적 없는 그 길에서 유일한 주인은 가로등뿐이다. 자신의 의지와 상관없이 진행될 앞으로 일들이 그녀는 두렵고 무섭다. 이대로 이 낯선 곳에서 사라져버리면 그 남자에게서 완전히 벗어날 수 있을 것만 같다. 그런 생각이 순식간에 그녀의 머릿속을 뒤덮었고, 그녀는 망설임 없이 골목 안으로 뛰어든다. 뒤돌아보지 않으려 애쓰며 그녀는 정처 없이 안으로 걷고 또 걸었다. 남자가 끝내 그녀를 찾아내길 바랐는지는 잘 모르겠다. 그렇게 한참을 걸어 골목을 벗어나보니, 뜻밖에도 눈앞에는 황량하고 끝없는 고속도로가 펼쳐져 있다….
여자는 커튼 사이로 숨김없이 드러나는 빛의 움직임을 주시하며, 잠시 이야기를 멈췄다. 그때까지도 계속 서 있었던 남자는 턱에 손을 괴고 바닥만을 주시하고 있다. 조심스럽게 그가 입을 연다.
“늘 그렇게 어디론가 피하시나요?”
“이게 꿈의 끝이 아니에요…, 시작이죠.”
그녀는 눈을 감고, 소파에 몸을 파묻힌 자세로 그렇게 말했다. 남자는 계속 창가에 서 있기로 마음을 먹는다.
“당신에게 검정색은 무엇을 의미하나요, 그럼?” 그가 다시 묻는다.
“음…. 서구식의 상류사회? 매끈한 스타킹도 생각나네요. 침묵 그리고 커피도요.” 여자는 눈을 뜨지 않는다.
“그렇군요. 그 다음은요?”
“네?”
“그 다음이요, 고속도로가 나오고 어떻게 되었나요?”
고속도로 앞에서 그녀는 현기증이 날만큼 어지러웠다. 전에 결코 본적이 없는 너무나 낯선 곳이었다. 집으로 돌아가야 했다. 시간을 보니, 밤 12시가 가까워지고 있었다. 걱정하실 부모님의 얼굴이 떠올랐다. 그렇지만, 휴대폰을 꺼내들어 누구에게 전화를 걸어 도움을 청해야 할지 난감했다. 아무도 생각나지 않았다. 막막하고 아득하다. 고속도로의 양 옆은 댐처럼 높다랗게 솟은 콘크리트 벽으로 둘러싸여 있고, 무수히 많은 차들은 어디선가 쏟아져 나와 도로 위를 질주했다. 밤이었으나 훤한 콘크리트에 둘러싸인 한 낮의 세계였다. 저만치 도로 옆에 있는 한 가게로 그녀는 뛰어 들어갔다. 우선 이곳이 어디인지 알아야했다. 뭉뚱그려진 형체의 기운만 남은 주인아주머니는 반대편에서 택시를 타라고 알려준다. 집으로 가는 방향이었다. 그녀는 지체 없이 도로 아래쪽으로 이어진 계단을 따라 길을 내려갔다. 텅 빈 주차장 같은 터널이 나오고, 그 터널의 끝자락에서 맞은편 도로가 시작되고 있었다. 그녀는 손을 들어 지나가는 택시를 세운다. 그러나 눈앞에 멈춘 택시의 기사는 아까 처음의 방향이 옳은 방향이라고 말한 뒤 사라진다. 그녀, 갑자기 복받쳐 오르는 듯 울음이 터져 나온다. 허탈하고 외로웠다. 시계를 보니 벌써 새벽 1시. 더 이상 시간을 낭비할 수 없었다. 주저 않을 듯 심하게 떨리는 다리에 힘을 주고 다시 아까의 그 반대편으로 뛰어갔다. 그러나 이번에는 아까와 길이 완전히 다르다. 갑자기 대형마트의 입구가 보이고, 국적이 불분명한 사람들과 알 수 없는 식품들로 마트 안은 정신없고 요란하다. 어떻게 빠져나왔는지 모르게 그곳을 나온 그녀는 멀리 보이는 커다란 문을 향해 뛰어간다. 그리고 손잡이를 힘껏 돌려 문을 열었다. 눈앞에는… 예기치 않게도 평화로운 호숫가의 풍경이 펼쳐져 있다. 높게 뻗은 느티나무아래에서 두 명의 청년이 칵테일을 마시다가 그녀를 발견하고 다가온다. 그들은 기다렸다는 듯이 집으로 가는 지름길을 그녀에게 알려준다. 청년들이 가리킨 언덕의 오솔길을 따라 한참을 걸어가니 넓은 평야가 나오고 몇 몇 사람들이 모여 웅성거리고 있는 것이 그녀의 눈에 보인다.
“저기, 잠깐요!”
조용히 얘기를 듣던 남자가 소리쳤다.
“네?”
“그냥... 괜찮은가 해서 불렀어요.”
남자는 성큼 소파로 다가와 그녀의 맞은편에서 조금 멀찍이 앉는다. 그녀는 이마로 흘러내린 몇 가닥의 머리카락을 쓸어 뒤로 넘겼다. 탐색하듯 쏘아보는 남자의 시선을 그녀는 애써 피하고 있다.
“평소에도 그렇게 자주 길을 잃어버리나요? 아님, 예전에 심하게 길에서 헤맨 적이 있나요?”
남자가 물었다.
“네, 길치라고 하죠. 방향감각이 좀 남다르게 부족해요. 그럴 때마다 식은땀이 날 정도로 창피하고요.”
여자는 갑자기 환해진 방안을 의식한 듯 눈을 껌벅거리며 대답했다.
“누구한테 창피하죠?”
“뭐, 저 스스로도 그렇고, 같이 있는 사람에게도 그렇고. 상황에 따라 틀리지만 꿈에서는 늘 같은 방식으로 길을 잃어요. 그리고 핸드폰이 손에 있지만 전화가 걸리지 않죠.” 여자는 씁쓸하게 웃으며 말했다.
“그건 창피해할 일이 아닌데…, 사실 전 냄새를 잘 못 맡아요. 곤란할 때가 많죠. 특히 집사람이 무슨 요리를 할 때나, 아님 제가 상한 음식을 잘 구별 못하고 아무거나 냉장고에서 꺼내 그냥 먹을 때…. 그럴 때요. 그래도 창피하단 생각은 안했어요.”
“다행이네요.”
“뭐가요?”
“이런 꿈 얘기에 대해서 사회성이 어떻고, 개인의 성적 취향이 어떻고 뭐 이런 자질구레하면서도 유쾌하지 않은 말들을 꺼내지 않으시잖아요.”
“지금 막 꺼내려고 했는데요.”
남자는 아무렇지 않게 미소를 지었고, 여자는 그런 그를 보면서 조금 안도했다. 더 이상 복잡해지는 일은 없을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음…. 그럼, 이제는 그림들에 대해서 얘기해 볼까요?”
“꿈 얘기가 더 남았어요. 조금 더 들어보세요.”
“네, 그러죠.” 여자는 그의 말이 떨어지기가 무섭게 다시 눈을 감았다.
사람들에게로 가깝게 걸어간 그녀는 하와이에서나 어울릴 법한 문양의 남방을 입은 아저씨와, 타히티 섬에서나 환영받을 것 같은 긴 생머리의 아주머니에게 조심스럽게 말을 건넸다. 그 두 사람은 그녀를 기다리고 있었다는 표정으로 밝게 웃는다. 무사히 집으로 데려다 주겠다고 말하며 때마침 그들 앞에 멈춰 서 있는 차에 그녀를 태운다. 레몬색의 차 내부는 따뜻하고 아늑하다. 사실 차안에서의 그녀는 이상하게 편안하고 나른하다. 긴 머리의 아주머니는 화장이 짙으나 무척 세련돼 보인다. 그녀를 쳐다보며 계속해서 웃고 있다. 차창 밖으로 보이는 긴 하늘‥너무나 파랗고 맑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