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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8.
2009/10/24

beyondcafe

온난한 이웃의 시로코

-My mild neighbor, Sirocco

      written by Beyondcafe

 

다음날 아침 눈을 떴을 때

 

  그렇게 가버린 락씨를 뒤로하고, 나도 내 나름대로 뭔가를 준비해야 할 것 같았다. 간단히 내부 청소를 하고 부엌으로 가서 아껴둔 접시를 꺼내었다. 미국에 잠시 있을 때, 창고 세일로 사둔 일본제 접시였다. 밋밋하게 아무 무늬도 없는, 약간 푸르른 빛이 도는 흰 도자기 접시는 그야말로 단아한 멋이 있다.  락씨 말로는, 음식을 담는 접시의 무늬와 색상이 단조로워야 오히려 음식이 더 돋보인단다. 그의 말대로라면 이 접시들이 제격일 것 같다. 락씨는 이번에도 집에서 음식을 만들어 올 모양이다. 술 안주를 만들 때도 늘 그랬다. 카페 부엌을 사용해도 되는데, 무슨 결벽증도 아니고 사적인 용도의 음식을 할 때는 그게 더 편하단다. 자신의 집에 재료가 더 많다는데, 뭐 할 말이 없다. 문득, 담백한 접시들을 보고 있자니 오코노미야끼가 먹고 싶어진다. 짙은 사케와 함께. 물론 브런치를 그렇게 먹자고 하면 누군가가 내 그림자를 째려볼게 뻔하지만.

  오후 4시까지는 예약이 되어 있음을 문 앞 칠판에 적었다. 정식 손님은 아니지만 락씨와 나, 그리고 매큐에겐 처음 있는 시간인 만큼 방해받는 일은 없어야 할 것 같았다. 디저트까지 락씨가 준비한다고 했는데, 분명히 와인도 가져올 것이다. 음료수는 뭘 준비해야 할지 귀띔이라도 해주지. 저번에 사놓은 자몽 주스라도 꺼내야겠다. 커피는 아이스 비엔나로 할까.

  제일 먼저 도착한 것은 매큐였다. 12시 30분. 약속시간보다 이렇게 일찍 들어서다니. 어지간히 할 일이 없었구나 싶었다. 매큐는 조금 겸연쩍은 표정이었는데, 옷차림만큼은 시원하고 단정하다. 그 특유의 말끔함이 오늘따라 돋보인다. 파란 스트라이프 남방에 짙은 색의 청바지를 입고 왔는데, 무성의하게 보이면서도 세심하게 다듬어진 모습이다. 무엇을 입어도 단정한 스타일이라고 할까. 단정함이 소박하지 않고 어쩐지 경쾌하다. 이에 견주어, 락씨의 단정함도 지지는 않는다. 하지만 모랄까. 락씨는 어딘지 모르게 허술하고, 약간 흐트러진 단정함을 가졌다고 할까. 왠지 모르게 셔츠의 단추 한 두 개가 슬그머니 풀어질 것 같은 반전이 숨은, 그런 말끔함 말이다.

카페로 들어선 매큐는 밝게 웃으며 바에 서 있는 나를 향해 인사하듯 말했다.

“뭐 하세요?”

“어! 일찍 왔네. 앉아 편하게. 덥지 오늘도?”

“네. 무지요”

매큐는 책장 앞 소파에 앉더니 가만히 벽을 응시했다. 생각해보니 매큐가 카페에 이렇게 오기는 처음이다.

“저 사진들 직접 찍으신 거예요?”

“뭐, 여행가서 찍은 것도 있고, 외국에서 파는 액자 속 광고지 같은 사진도 있고.”

“커피 마시는 사람들의 사진들이네요. 와‥ 흑백이지만, 제각각 느낌이 틀려요. 이렇게 같은 액자로 맞추어서 걸어두니까 멋진데요.”

매큐는 입까지 반쯤 벌리고 사진들을 감상한다. 그렇게 유난스럽게 감동한 사람은 그가 처음인 것 같다.

“락씨가 오늘 브런치 먹자고 했어. 곧 음식가지고 이리로 올 걸.”

“네, 안 그래도 올 때 잠깐 들렸는데, 문이 잠겨 있더라고요. A4용지 같은 것으로 유리문에 안내문이 붙여 있는데, 웃겨서 혼났어요.”

매큐는 장난 끼 가득한 눈빛으로 뒤돌아 나를 향해 앉으며 얘기했다.

“뭐라고 되어 있었는데?”

“【오늘은 서점의 책들이 월차입니다.

주인은 맞은편 카페에 있으리라 추정됩니다.

급하시더라도 내일 뵙겠습니다.】”

매큐는 또박 또박 되도록 락씨의 말투를 따라하는 듯 진지하게, 그 안내문이 바로 눈앞에 있는 것처럼 말했다. 나는 그런 매큐가 더 재미있었다.

“오늘은 그럼 월차의 날이군. 월차에 브런치라…제대로다.”

이제는 정말 별일이 아니고서는 락씨에게 놀라지 않는 내가 되었다는 것이 가슴깊이 기특하다. 자신의 서점에 진열된 책들에게까지 월차를 주는 특권을 가진 사람은 락씨뿐이리라.

“아침은 먹었어?”

“아뇨. 그냥 선식 먹었어요. 시골에 계신 엄마가 직접 만드셔서 매달 보내주시거든요. 공복에 물에 타서 마시면 부담도 안 되고 편해요.” 매큐가 말했다.

“건강식이네, 좋겠다. 자취한다고?”

“네.”

“오늘 포식 좀 하고 가. 난 그냥 너 불러서, 샌드위치나 간단히 만들어 먹고 얘기나 하려고 했는데. 너 일시키겠다고 농담 좀 했더니 화내면서 결국 브런치 먹자며 저 난리다. 넌 정말 기특한 고용주 만난거야. 난 정말 엉뚱한 고용인을 만난거구.”

매큐가 소리 없이 미소를 짓는다.

“근데, 요새 뭐 서점의 책들이 네 손에서 자꾸 떨어진다며? 책들이 말썽이야, 아님 락씨가 말썽인거야?”

나는 제이슨 므라즈의 최근 CD를 한쪽 벽의 박스에서 꺼내어 집어 들었다. 되도록 아무렇지 않은 듯 말을 꺼내볼까 하는 심사였다.

“제가 말썽이죠. 뭐.” 매큐는 조용하게 대답한다.

“근데, 사장님 방금 CD 꺼낸 저 구두박스는 뭔가요? 눈에 안 띄는 검정색이라 몰랐는데, 저거 구두박스 맞죠?”

매큐도 이렇게 말 돌리는 재주가 있다.

“아 저거, 집에 하도 많아서 내가 그냥 모두 검정으로 칠해서 주문한 선반에 하나씩 넣어 둔거야. 수납도 되고 의외로 괜찮아. 안에 거의 다 CD들이야”

“사장님도 그럼 구두 수집광이세요?”

금세 눈이 동그랗게 된 매큐는, 의구심 가득한 눈초리로 나를 쳐다보고 있다.

“그냥. 형이라고 불러. 사장님은 무슨. 저건, 외삼촌이 예전에 구두 수입 일을 하셨거든. 신상품이 나올 때마다 집에 갖다 주시곤 했지. 가끔 재고도 갖고 오시고 말이야. 그래서 박스들이 창고에 많았어. 지금은 그만두셨지만.”

왠지 매큐는 조금 실망한 것 같다. 차라리 취미로 모았다고 할 걸 그랬나. 사실, 난 수집하는 것이 특별히 없다. 하나에 뭔가 열정적으로 집중하는 성격도 아닐뿐더러, 특히 그것이 물건일 경우에는 더더욱 그렇다. 아는 선배가 피큐어들을 위한 방이 따로 있어서 매일 부인과 아이들로부터 그 방을 보호하기 위해 고군분투한다는 얘기는 들었다. 하지만 나 같은 경우는 그냥 부인과 아이들을 보호하는 쪽이 더 적성에 맞는다고 할까. 여하튼 만약 무언가 수집하고 싶다는 생각이 들어도 구두는 분명 아닐 것이다. 나중에 락씨가 오면 매큐에게 다시 아까의 질문을 해야겠다. 나랑은 아직 어색해서인지 계속 인테리어 얘기만 하는 녀석에게는 분명 락씨가 필요할 것이다.

“음악 좋은데요?” 매큐가 말했다.

“괜찮지? 저번에 앨범 하나 샀어. 그냥 틀어두면 편하고 경쾌해.”

“형은…그러니까, 차는 없어요?” 갑자기 매큐가 물었다.

“팔았어.”

“네에, 카페 하려면 돈이 많이 들죠.” 제법 어른스러운 어투로 녀석은 말한다.

“아니, 여행 가려고 팔았어. 나중에 하나 사야지.”

“어딜 가셨는데요?”

“미쿡.”

매큐가 키득 키득 웃는다.

  때마침 락씨가 들어왔다. 1시가 조금 넘었다. 유리문 너머로 락씨의 그 문제적 차가 보인다. 카페 앞에 주차시켜 놓으니 묘하게 이 공간과 어울린다. 락씨의 차는 흰색 포니 픽업이다. 내가 고등학생이었을 때 처음 봤던 그 차를, 지금의 락씨가 몰고 다니는 것이다. 그렇다고 오랫동안 차를 간직한 주인도 아니었다. 우연히 대형마트에서 보고서는 주인 할아버지의 집까지 쫓아가서 사정하여, 제법 큰 액수까지 지불하고 샀다고 한다. 거의 1년 동안 찾아가서 애원했다고 하니까 의지가 대단한 것이다. 왠지 무언의 협박이라도 하진 않았을까 걱정되지만. 사실은 할아버지의 아들이 자신의 아버지가 드디어 차를 바꾸실 때라고 생각하여 락씨를 도와 할아버지를 설득해서 된 일이지만 말이다. 빈티지 20년의 귀한 포도주를 산 기분이라고 했다. 락씨는 무엇이 그렇게 그리웠을까. 수없이 많은 해가 뜨고 질 때마다, 할아버지와 함께 했을 긴 여정의 도로들, 창밖의 풍경들, 옆자리에 함께 했을 누군가와의 추억들까지. 락씨는 정말 그 엄청난 이야기들의 향연이 그리웠던 것일까. 그나저나 락씨는 이제 여자 만나기 힘들 것 같다. 누가 저 차를 타고 데이트하자고 할까. 락씨같은 여자라면 또 모를까. 아, 그건 상상하자니 머리가 아프고.

 

to be continued....